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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의 작품을 그린 폴 고갱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폴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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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에 대하여

폴 고갱
폴 고갱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본명 외젠 앙리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 출생이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인데,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되고 그는 이때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여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는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유년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불행으로 시작했다.

폴 고갱이 리마에서 보낸 시기는 1849-54년까지 였으며 리마에서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1854년에 고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1865년 12월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사관후보생이 되어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그후 1년뒤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1873년에는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5명의 아이도 생겼다.
이때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또한 미술품 수집뿐 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27세부터는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하지만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온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인상파풍 외광묘사를 버리고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나비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7년엔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여 1년정도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이때 만들어진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고흐, 로트레크 등과 친분을 쌓았고,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았다고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두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했으며,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그는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가다가 1891년 2월 작품을 처분하며 원시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 1일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말년의 작품들이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 그리고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893년 6월 4일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1월에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는데,
이후로 고갱은 자신이 경험한 타히티섬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소개를 위해 그림을 목판으로 제작하였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깊은 좌절감만 쌓여갔다.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그로인해 고갱은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후에 파리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은 피카소 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타히티로 돌아온 고갱은 병마에 시달렸을뿐만 아니라 지난 1년간 파리에서 겪었던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때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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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부채를 든 여인' , '해변의 말 탄 사람들' 등의 작품을 남겼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폴 고갱이라는 작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한것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문학작품을 읽고 난뒤 부터였다.
이 작품은 폴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며 실제 삶과는 다른점이 많긴 하지만 이 글을 읽고 폴고갱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읽어보시면 좋을것 같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폴 고갱의 작품들로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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