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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스승. 카미유 피사로


카미유 피사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그는 쿠바에 가까운 생 토마스섬에서 프랑스계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에 파리로 넘어가 도화를 익힌 다음 회화에 뜻을 두고 1855년에 다시 동경하던 파리에 나섰다. 처음에는 코로와 도비니의 풍경화에 매력을 느꼈고,
연구소에서 모네와 세잔을 알게 되고 그 후에도 야외에 나가 햇볕 아래에서 풍경 그리기에 열중한다.



카미유는 루브센에 주거를 두었고, 보불전쟁이 시작되자 전쟁을 피하여 런던으로 넘어가서 다시금 모네를 만난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터너를 만나서 빛의 표현에 대한 지도를 받고 인상파의 표현을 완성시켰다. 그후 피사로는 얼마 동안 퐁투아즈에 살며 거기서 세잔을 만나 그를 인상파로 끌어들였다.
퐁투아즈에 머물 당시 무명 작가였던 폴 고갱이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1874년에 그는 친구들과 인상파 전람회를 결성하였다.

 


인상주의 작가들의 핵심인물이었던 그는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에드가 드가와 같은 화가들과 전설이 된 총 8개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피사로는 인상파의 중심인물이 되어 그의 생애는 인상파적인 그림에 전념했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느껴지는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그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또한 그는 강렬한 구도로 표현된 시골 생활뿐 아니라 도시 풍경을 그리는 대단한 화가였다.



특이한 점은 피사로의 초기 풍경화들은 작가인 에밀 졸라와 다른 평론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나, 대중으로부터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현재도 피사로는 모네나 르누아르 등 다른 동료 화가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인상파 작가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렸다.

1870년에서 1871년까지 치러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넘어갔다. 1870년대에 피사로는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함께 작업하며, 색조를 조금 더 밝게 하고 붓놀림을 줄였다.
그리고 런던에서 파리 출신의 화상인 폴 뒤랑 뤼엘을 만났으며, 뒤랑 뤼엘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열렬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피사로의 말년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를 숭배했다. 피사로는 눈병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방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보이는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카미유 피사로는 실력뿐아니라 많은 제자들 그리고 그를 숭배한 인상주의 화가들을 보면 인성또한 훌륭했을것이다. 폴 세잔은 피사로를 두고 '겸손하고 위대한 스승'이라 말했다.
피사로는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정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자연을 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현혹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대담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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